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4대 대통령 선거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4대윤보선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취임 연설을 하는 [[윤보선|{{{#ffffff 윤보선}}}]] 대통령 당선인''' ||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60윤보선당선_동아일보.png|width=100%]]}}} || || '''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''' ||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" [youtube(Ttmqir-lbtQ)]}}} || || '''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취임식 영상''' || >'''제53조''' > >[[대통령]]은 양원합동회의에서 선거하고 재적국회의원 3분지 2이상의 투표를 얻어 당선된다. >1차투표에서 당선자가 없을 때에는 2차투표를 행하고 2차투표에서도 당선자가 없을 때에는 재적의원 3분지 2이상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투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한다. >대통령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으며 대통령직외에 공직 또는 사직에 취임하거나 영업에 종사할 수 없다. >---- >[[대한민국헌법]] 제4호 제53조 [[3.15 부정선거]]에서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[[이승만]]이 당선을 포기해 제4대 대통령을 다시 선거해야 했는데, 6월 15일 [[허정]] [[대통령 권한대행]]이 [[대한민국 제2공화국|제2공화국]] [[헌법]]을 공포해 대통령 선거가 간접 선거로 바뀌어 3.15 때와 달리 [[제5대 국회의원 선거]]로 구성된 [[국회]]의 간접 투표로 제4대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. [[대한민국 제2공화국|제2공화국]]은 '''[[의원내각제]]'''를 선택하였으며, 이에 따라 대통령 선출은 국민직선제가 아닌 의회에 의한 간선제로 이루어졌다. 당시 상·하원이던 민·참의원 합동투표에 의해 치러졌으며, 3분의 2 이상의 득표자가 없을 경우, 다시 2차 투표를 진행하고, 2차 투표에서도 당선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원 의원들 3분의 2 이상의 출석으로 과반을 득표한 자가 당선되는 방식의 선거였다. 후보 등록 절차 같은 건 없고 [[국회의원]]이 아무나 맘에 드는 사람 이름을 써내는 일명 [[콘클라베|교황 선출]] 방식이었다.[* 원래 국회에서 선거를 할 때는 보통 다 이런 식이다. 예를 들어 지금도 국회의장 선거를 할 때 분명히 출마하겠다고 한 적이 없는 사람이 표를 받곤 하는 것도 이런 이유. 국회의원 자신이 원하면 자기 엄마 이름을 써내도 유효표가 되는 이 시스템의 부작용은 당선자가 사실 그 직책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, 실제로 [[1951년]] [[제2대 부통령 선거]]에서 [[김성수(1891)|김성수]]가 선출됐을 때도 인촌 본인이 거부해 수락을 설득시키는 데 고생해야 했다. 결국 인촌은 부통령직을 수락한 대신 자신을 [[각하(호칭)|각하]]로 부르지 말아달라고 했다.] 당시 [[민주당(1955년)|민주당]]은 당권을 잡고 있던 신파와 8월 4일 분당을 선언한 구파로 분열돼 있었는데, 구파는 [[국무총리]]에 [[김도연(1894)|김도연]], 대통령에 [[윤보선]]을 내세운 반면 신파는 국무총리로는 [[장면]]을 밀되 분당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은 윤보선을 지지한다는 전략이었다. 신파에서도 윤보선을 지지한다는 소식에 구파는 윤보선 대신 김도연을 대통령으로 밀 것을 고려하고, 이 소식을 들은 신파 역시 윤보선 지지 철회를 고려하는 등 두 파벌 간에 웃지 못할 눈치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. 양원 의석의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던 민주당의 두 파벌이 결과적으로 모두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지지하면서 대통령 선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. 선거 결과 윤보선이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60081200329201011&editNo=2&printCount=1&publishDate=1960-08-12&officeId=00032&pageNo=1&printNo=4434&publishType=00020|압도적으로 당선]]되자 민주당 신파 및 중도파는 분당 무산을 기대했지만 구파는 얼마 뒤 [[신민당(1960년)|신민당]]을 창당한다. 이때 윤보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유의미한 득표를 한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[[김창숙]] [[성균관대학교]] 초대 총장으로, 일부 무소속 민의원의원들이 '정국이 일당제로 흘러가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비민주당 후보가 필요하다'며 출마 선언을 한 적도 없는 김창숙을 지지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.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60081300209202003&editNo=2&printCount=1&publishDate=1960-08-13&officeId=00020&pageNo=2&printNo=11817&publishType=00020|주목되는 무소속 결속... 29표 출현으로 기압권을 형성, 총리 인준에 새 협상 기도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